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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창고 _ 이원형

조회 수 1712 추천 수 0 2016.02.24 20:44:53



 

마당 한쪽에 경운기와 경차 한 대가 나란히 서 있다. 집 지하수 관정이 있는 자리다. 앞쪽으로 작은 창고 두 개가 같이 있다. 골목쪽 창고는 목수였던 아버지가 쓰던 각종 공구와 농자재가 들어차 있다. 옆 장독대가 있는 쪽 아래창고에는 추수한 벼와 콩, , 옥수수, , 수수 등 입으로 들어가는 농작물이 있다. 이곳은 곡식창고인 셈이다.

 

명절이면 마당에 불을 밝힌다. 토방위에 달린 백열등을 밤늦도록 켜놓는다. 조카들은 쉼 없이 방과 마당을 오간다. 추우니까 문 닫고 다니라는 할머니의 지천에도 아랑곳없다. 낮보다 즐거운 밤을 보내는 건 조카들뿐만 아니다. , 누나, 형수, 매형들이 다 모인 큰방에서 웃는 소리가 떠나질 않는다. 영업맨인 작은매형이 분위기를 띄운다. “제가 위하여하면, ‘’, ‘’, ‘를 띄워서 외치는 거에요!”

 

아래창고 백열등도 수시로 켜고 꺼진다. 명절을 맞아 사놓은 맥주와 소주, 과일, 주전부리가 여기 있다. 아버지는 안방과 아래창고를 오가며 술과 안주를 내어온다. 구부정한 허리에 한 손에 맥주를 다른 손에는 굵은 배를 가져와 안방 술상 옆에 슬쩍 놓는다. 그만 가져오라는 엄마의 잔소리와, 흥이 오른 자식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웃음만 짓고 또 나간다. 아래창고 문을 열고 등을 켜는 뒷모습이 익숙하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명절날 모인 자식들이 술상을 마주하며 떠들고 놀 때(아버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아래 창고를 오가며 술과 과일을 내어오던 외할아버지다. 아래 창고는 시간을 담은 공간이기도 하다.

 

예전에 오리를 키우던 곳이다. 집을 입식을 바꾸는 대공사, 지금으로 치면 리모델링을 하면서이곳에 창고를 지었다. 부엌 쪽이랑 가깝고 북쪽이어서 서늘한 곳에 보관해야 하는 곡식과 쌀, 과일을 넣어두는 공간이다. 마당을 두고 집을 채로 나눠 기능을 분리해서 배치를 따랐다. 대갓집이라면 광이 있을 테지만, 우리집과 외갓집은 아래창고를 광으로 썼다.

 

이젠 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아래 창고를 오간다. 온갖 곡식이 창고 한쪽 선반을 꽉 채우고 있다. 명절이라 창고 바닥은 온갖 물건과 곡식으로 어지러웠다. 엄마랑 같이 옮겨 넣었던 큰 장독이 그대로 있다. 낡고 오래된 물건 투성이지만 그만큼 많은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겨우 맥주 박스를 찾고, 딸기와 사과를 광주리에 넣어서 나왔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아래 창고에서 사과박스 하나를 들고 올라왔다. 깨와 참기름, , 고구마, 호박이 들어있었다.

 

24평 아파트로 돌아왔다. 면적은 이곳이 더 넓다. 방이 세 개나 되고, 거실과 주방, 화장실이 있다. 채로 나뉜 시골집 여러 공간을 퍼즐 맞추듯 실내공간으로 만든 아파트다. 그런데 깨와 호박, 갓 캔 시금치 놓을 곳이 없다. 갈 곳 없이 식탁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래창고에서 나왔지만, 이곳에는 들어갈 곳이 없다.

 

가족이 우리집에 오면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이야기를 꺼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래창고에서 꺼내오던 이야기를, 난 꺼내올 수가 없다. 내 아이는 어디서 내 이야기를 발견할까. 냉장고에서 꺼내서 그런지, 너무 차갑고, 너무 균일한 이야기만 기억하지 않을까.


글 / 이원형 강사



이 글은 <고두현 시인과 함께 하는 칼럼 쓰기> 1기 우수 과제입니다. 

에세이형 칼럼으로 우리 일상의 소재를 사유로 잘 버무려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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